직원휴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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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6. 22 - 2018. 07. 21
작가 : 김시훈
한낮의 미궁
세계 내 모든 개별들이 만나는 경우의 수는 얼마나 될까? 각 개별들의 점 사이를 관계의 선으로 이어보자. 우리는 마치 면처럼 보일 셀 수 없이 많은 선들의 교차를 확인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 구조를 나는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 세계의 구조가 특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면 그 모습은 시스템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그 자체는 가시적이지만 삶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들은 비가시적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건들이란 무슨 이유로, 어떻게 발생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핏 실체가 없는 진공을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스템 안을 살아가는 우리는 발을 붙일 수도, 몸을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투명한 거미줄에 걸린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는 경험 가능한 수많은 관계들에 의해 세계 속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시스템에 부재하는 자유로부터 우리의 존재는 증명된다.
김시훈의 작업은 거대한 시스템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의 재구성이란 두 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시스템 그 자체를 평면의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치환된 이미지로부터 시스템 내 우리의 존재방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시스템과 그 작동방식에 대해 인지하며 시스템의 일부로서 매몰되고 은폐되는 사용자로서의 인간을 조명한다. 이미지들은 하나의 스펙트럼 안에서 세 국면의 양상을 띤다. 시스템-시스템 사용자이자 인터페이스로서의 인간-시스템과 인간의 관계가 그것이다. 다소 순차적인 작업들의 구성은 작가가 세계와 인간의 작동방식을 규명하기 위한 조형언어의 전략적 사용으로 보인다. 이렇듯 추상과 구상, 사변과 실천, 이상과 질료적 구현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화면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이미지로서의 논증에 가깝다.
시스템
그에게 시스템이란 인간사회의 필수불가결한 구조다. 사회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물리적 사건들과 제한들의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결합들로 구성된다. 이 결합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인과와 잉여 등을 무한히 생성해내며 이들이 뒤섞여 시스템을 유지한다. 시스템은 마치 자기 스스로 자아를 가진 듯 몸집을 키운다. 작가는 이처럼 자가증식하는 시스템을 추상적 이미지로 가시화하여 화면에 옮긴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시멘트우화' 시리즈(2018)의 크로마키에 가까운 색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텍스처의 추상적 도상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형식적 프레임으로서 다양한 개별사건들을 대입하도록 유도한다.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주변 사물과 풍경의 파편들이 기존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평면에 재구성된다. 또한 실제 사건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스템의 조각들은 회화를 통해 가상의 속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임의적 풍경'(2018), '테두리 밖'(2018)등의 작업은 우리가 경험 가능하지만 전체를 조망할 수없는 거대 시스템의 일부를 드러냄으로서 그 전체를 추측 가능하게 한다. 눈을 감은 채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듯 보이지 않지만 어렴풋이 감각 가능한 제한들이 화면을 구성한다. 플랫하게 묘사된 무결점의 도상들과 비정형의 단면들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시스템 전체로부터 소실된 일부로서 이미지 위를 부유한다.
시스템 사용자이자 인터페이스로서의 인간
김시훈에게 인간은 시스템에 저항하는 의지적 인물이라기보다 시스템에 편입되는 소극적 인간에 가깝다. 그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용자이자 동시에 시스템 구성요소로서의 인터페이스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란 시스템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 정의되는 듯 보인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 전체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데,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인식불가능을 오히려 편리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편리함에 관한 착각은 우리를 시스템 내 수동적인 삶에 안주하게 만들며 자연스레 인간을 시스템의 권력구조 안에 위치하게 한다. '지면들(2018)'이나 '오늘이 오면(2016)'은 작업복이나 표어 등 자신의 행위를 제어하는 지시적 기표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용자로서의 인간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 내 상징적 제한들과 인간 사이에 감도는 기묘한 모순의 감각들이 인상적이다. 반면 '수직동기화(2017)'와'한시적 점유(2017)'의 경우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인간을 좀 더 가시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무릇 욕망을 지니기 때문에 모든 의식 행위는 시스템 내에서 자발적으로 소모된다. 이 때 욕구를 버리지 못하는 한 인간은 시스템 안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데 사실상 이를 버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시스템에 적응하고자 스스로를 구조 내에 포섭시킨다. 인간이 그 자체로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동시적 정의는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회화적 시도로서 드러난다. 이처럼 작가는 시스템에 대응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실험적 이미지로 구현하고자 한다.
시스템과 인간의 관계
이제 그의 작업에서 시스템과 인간의 관계는 좀 더 분명해진다. 작가의 확신은 인간이란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권력구조를 전복할 수도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점에 있다. 김시훈은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자발적 의지 등의 전형적 유토피아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시스템과 인간 사이의 기형적이고 수직적인 현상 그 자체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 있다. 특히 시스템이 인간을 다루는 태도, 즉 겉으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마저도 제한하고 은폐시키려는 구조적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는 직원휴게실이라는 구체적 사건으로 이미지화 된다. 대부분의 휴게실은 노동자들에게 휴식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그 휴식조차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사회로부터 은폐된다는 점이 그에게 인상적인 은유로 다가왔다. '직원휴게실'시리즈(2018)의 인물들은 표정이 없다. 짓이겨진 얼굴은 노동자들의 생각 혹은 감정을 읽어낼 수 없게 만든다. 화면에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는 것은 실천되지 못하는 표어들이다. 기의가 없는 기표들이 난무하는 장소들은 꽤나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작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철학적 관심을 회화로 드러낸다. 추상이 되지 못한 구상, 일반이 되지 못한 개별들의 남루한 풍경들이 거울처럼 비춰진다.
나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다소 낭만적이길 바란다. 내가 무엇으로부터의 일부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으로 서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상적인 바람일 뿐이란 걸 안다. 늘 그러하듯 나 자신으로 서는 일은 필연적으로 지반과 사건을 필요로 한다. 시스템에 대한 해명은 곧 시스템 안, 경험의 축적으로서의 나를 스스로 인식하는 일이다. 세계와 나의 관계를 그 자체로 오롯이 바라보며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그의 작업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실존을 어렴풋이 감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지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모든 인간과 사건들이 이미지가 되는 장소, 그렇게 생성된 개별 이미지들이 끊임없는 상호결합에 의해 외형을 바꾸는 시간은 교차되는 축의 단면으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오후 세 시 반,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천미림(독립 큐레이터)